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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 인사말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박인환 교수

2013년 7월 1일 행위무능력자제도는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나고, 성년후견제도가 시행되었습니다.

사람은 타인과 교류 없이 고립된 삶을 살아갈 수도 있지만,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유지하면서 또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우리”라는 공동체에서 타인과 교류하며 생활해야 할 것입니다. 타인과의 교류와 소통, 타인과 공존하는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매개체, 수단은 바로 의사결정입니다. 의사결정은 사회구성원 상호간을 연결시켜 “우리”라는 공동체가 생길 수 있도록 만드는 신경망과 같은 것입니다. 의사결정능력이 없거나 의사결정능력에 장애가 있는 성인들은 바로 이 신경망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행위무능력자제도는 이들 의사결정능력 장애인을 보호한다는 미명 하에 사회에서 배제시켰습니다.

그러나 “우리”라는 공동체의 구성원은 모두 존엄하며, 각자 고유한 가치관과 세계관으로써 행복을 추구해 나가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이처럼 다양하기 때문에, “공동체”라는 하나의 아름다운 빛깔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행위무능력자제도는 의사결정능력 장애인들로 하여금 사회에서 배제하여 그들을 “무색”으로 남도록 강요했습니다. 그러나 의사결정능력 장애인도 자기 나름의 색깔을 내면서 살아 갈 권리가 있고 이를 존중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라는 “공동체”가 만들어 낼 아름다운 빛깔에 더 큰 보탬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의사결정능력 장애인이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행복을 추구하는 삶을 살기 위한 출발점이자 최소조건이 바로 사회통합적 삶입니다. 사회통합적 삶의 영위를 위해서는 이들의 손상된 신경망이 작동될 수 있도록, 또 타인과 연결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지원하는 제도가 필수적입니다. 2013년 7월 1일 시행된 성년후견제도는 바로 이런 기능을 수행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새로운 성년후견제도가 의사결정능력 장애인의 손상된 신경망의 복원을 지원하는 제도로 자리 잡기까지는 먼 길을 가야만 할 것입니다. 수백년, 수천년 동안 이어져 오던 편견과 차별이 하루 아침에 없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우리나라에는 피후견인을 차별하는 300여개의 법령이 남아 있는 것만 보더라도 이를 알 수 있습니다. 그 먼 길은 혼자서는 갈 수 없습니다. 내가 가고, 그 다음 길을 우리가 가고, 그 넘어 있는 길은 다음 세대가 감으로써 비로소 도달될 참으로 먼 길입니다. 이 먼 길은 지친 발걸음을 격려하는 동지와 동반자 없이는 갈 수 없습니다. 이 길은 “대한민국”의 우리만 가는 길이 아니라 “세계”의 우리가 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세계의 우리”가 가는 길의 목표와 방향은 같습니다. 의사결정능력 장애인의 사회통합, 존엄의 실현, 행복추구의 가능성을 극대화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같은 발자국을 좇아 밟아 갈 길은 아닙니다. 서로 떨어져, 그러나 손 잡고 가야할 그런 길입니다. 예컨대 영국의 정신능력법과 유사한 법제도와 공공후견인청을 만들어 후견제도를 운영하는 싱가폴은 같은 아시아 국가인 우리에게 여러 가지 시사점을 줄 것입니다. 유엔 장애인권리협약의 기준에 현저히 미치지 못하는 법제도를 두고 있지만, 학자들과 시민단체, 공무원들의 헌신적 노력으로 그 한계를 극복해 가려고 하는 일본은 우리에게 큰 귀감이 됩니다. 가령 피후견인의 선거권을 인정하지 않는 공직선거법 제11조 제1항을 위헌이어서 무효라고 선언한 2013년 3월 14일 동경지방재판소의 판결, 아직 이 판결이 확정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공직선거법을 개정해서 올 7월 참의원선거 때부터 피후견인도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일본 의회의 움직임은 모두 학계와 시민단체의 헌신적 노력에 힘입은 것입니다.

성년후견학회는 우리 스스로를 Network 망에 접속시킴으로써 이 먼 길을 같이 가기로 약속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모인 모임입니다. 우리 보다 앞서 성년후견제도를 실시하고 있는 외국과도 Network 망을 연결시키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전개해 왔고, 앞으로도 또 전개해 갈 것입니다. 특히 우리 성년후견학회는 올해와 내년 중에 일본, 중국, 대만 등 동북아시아의 여러 나라만이 아니라 영국,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미국, 호주, 캐나다 등 구미제국과의 Network 망을 형성할 것입니다. “세계의 우리”로서 연결됨으로써 타인의 경험을 나의 경험으로 전환시켜, 우리의 성년후견제도가 의사결정능력 장애인의 사회통합을 촉진시키는 매개체로 빠른 시일 내에, 그리고 제대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나의 지혜는 부족하지만, 우리의 지혜는 크고, 나의 힘은 작지만 우리의 힘은 크다는 믿음 하에, 비록 먼 길이지만, 망설임 없이, 의심 없이, 그 길을 가기로 다짐하는 사람들이 모인 성년후견학회가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